박영(朴英) 본관은 밀양
이조 참판 수종(壽宗)의 아들로,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이다. 양녕(讓寧)대군의 외손으로 성종2년(1471)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낙향하여 선산읍 신기리(송당)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의주 목사 경상좌도 병사 병조참판 겸 중추 부사에 이르렀으나 항시 말하기를 "말을 달리고 칼을 쓰는 것은 한 남자의 용맹에 불과하니 사람이 학문을 배우지 않으면 어찌 군자라 하리오 ?" 하더니 연산이 손수 그 아버지(성종)가 기르시던 사슴을 활로 쏘는 것을 보고 "장차 이 나라가 어지럽겠구나" 하고 탄식하며 벼슬을 버리고 선조의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와 정붕 선생께 대학(大學) 강의를 받고 비봉산 아래 미봉사라는 절에서 오랜 세월 문을 굳게 닫고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대학을 읽은 횟수가 점차 늘어 대학의 참뜻인 "격물치지"(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 참뜻을 깨닫는다는 뜻)를 알 무렵 신당 선생이 찾아 왔다. 신당 : "그동안 만 번을 읽었지?" 송당 : "모레면 끝날 듯 합니다" 신당 : "지난 가을, 내가 저 냉산(冷山)을 가르키며 저 산 바깥에 무엇이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자네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지 않았는가?" "이제 그 만큼 공부를 하였으니 짐작이 있을 것이니 다시 한번 대답해 보게 저 산 밖에는 무엇이 있겠나?" 송당 : "산 밖엔 다시 산이 있을 것입니다" 신당 선생이 크게 칭찬하고 손을 잡으며,"자네 글 읽은 공을 알겠다고 하였다."고 하였다.<이것이 그 유명한 냉산문답 이다
또, "이제 어떤 공부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에 선생은 "의학을 공부해야 하겠다"고 했다. 시골에는훌륭한 의원이 없으므로 귀중한 생명을 잃게 되는 사람이 많으며, 의원이있다 해도 이름있는 양반 집에만 드나들게 되고 가난한 백성은 부모에게 약 한 첩을 못쓰고 생죽음을 당하게 되어,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로 했다는 뜻을 말씀드리자, 신당선생은 선생의 높은 뜻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성리학과 의서를 공부하여 불쌍한 생명을 구한자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며, 후세 사람들이 선생의 높은 덕을 기리어 "대학동자"라 부르고 있다. 70세로 일생을 마치니 나라에서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문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금오서원에 향사하고 있으며, 선생이 공부하던 곳에 송당(松堂-선산읍 신기리 낙동강변)이란 정자와 미수 허목(眉수 許穆)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1467년(세조 13)∼1512(중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 선산출신. 현감 철견(鐵堅)의 아들이며, 석견(錫堅)의 조카이며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149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고 정자·지평·정언(正言)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교리로 있으면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많은 사림파가 주살(誅殺)을 당할 때 현명하게 처신하여 몸을 보존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교리에 복직되어 상경 도중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뒤 정승 성희안(成希顔)의 건의에 따라 왕의 특지로 부름을 받았으나 홍경주(洪景舟) 등 간신배가 조정에 있음을 보고 낙향하자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재임 3년 만에 임지에서 죽었다. 천성이 매우 청백하여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의정 성희안과 젊어서부터 친교가 있었으며,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의 학통과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이황(李滉)이 일찍이 그의 학문이 깊다고 칭찬하였다.
《안상도 案上圖》를 지어 자경(自警)하였으며, 성리학자인 박영(朴英)이 그의 문인이다.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봉향되었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하강지(河綱地)와 함께 학문에 전심 전력하였다 한다. 1453년(세종 17)에 생원이 되고, 1438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경상감사에게도 전지를 내려 그의 병을 돌보아 주도록 하였다.
1444년 집현전 부교리가 되어『오례의주(五禮儀註)』의 상정(詳定)에 참여하였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하강지가 모함을 당하여 전라 감옥에 갇혀 병이 위독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 뒤 1448년 집현전 교리로 복직되고, 이듬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하여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문종이 즉위하자 장령에 임명되었다.
하위지의 강직한 기개는 이때부터 펼쳐지기 시작하였고 대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함이 없이 직언을 꺼리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鄭而漢)과 정창손(鄭昌孫) 선생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1453년(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하였다. 이해에 문종 때『역대병요(歷代兵要)』수찬에 참여하였던 집현전 학사를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품계를 올릴 것을 논의하여 올리자 이를 반대하였으며, 서적의 수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하등 가자될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이 가자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종신의 신분으로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하위지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하여 집현전 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경상도 영산의 온정에 내려갔다. 그 뒤 1454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다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佛堂)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이해에 『세종실록』을 편찬하는데 편수관으로 참여 하였고, 경연에서 시강관(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해 집현전 부제학에서 예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곧이어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의 즉위 후 하위지에게 교서를 내리 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기 때문에 세조의 녹을 먹는 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먹지 않고 따로 한 방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즉, 세조가 즉위하자 왕권강화책으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署事制)를 폐지시키고, 육조가 관장 사무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상계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 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1456년(세조 2)에 사예(司藝) 김질(金?)의 고변으로 단종복위 운동이 탄로나 그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 하위지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하면 될 터인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요.” 하였다. 하위지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刑: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에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하호(河琥)와 하박(河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았다.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한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은『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한 바 있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였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하여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한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하여졌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 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 영월의 창절사, 선산의 창열서원은 하위지의 학문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선산 단계천의 단계교와 그 뒤편에 휴허비각(遺墟碑閣)이 지금도 있으며 서쪽 5리지점에 공의 의관묘(衣冠墓)가 있다.
1389년(창왕 1)∼1456년(세조 1).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선산.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선산출신. 아버지는 관(琯)이다.
12세 때부터 길재(吉再)로부터 《소학》과 경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역학에 밝은 윤상(尹祥)이 황간현감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윤상은 그 열의를 보고 《주역》의 깊은 뜻을 가르쳐주기에 힘썼다. 1414년(태종 1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9년(세종 1)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고령현감을 거쳐,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그 뒤에 성균관사예가 되었으나, 1456년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해에 죽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하여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종직(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모시는 데 법도를 《소학》에 따르고, 남을 가르치기를 권태롭게 여기지 않아, 친상(親喪) 중에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조석을 올린 뒤에 가르치기까지 하여, 학업을 받는 자에게 준 감동이 매우 컸다. 훈도에서는 처음에 《동몽수지 童蒙須知》 유학자설정속편(幼學子說正俗篇)을 모두 암송시킨 다음 《소학》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효경》·사서오경·《자치통감》 및 제자백가의 순을 밟았다. 《소학》을 앞세우면서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자세는 길재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서, 16세기에 이르러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江湖(강호) 金叔滋(김숙자) 先祖(선조)는 조선 世宗때의 학자로 정몽주 길재 등과 같이 성리학의 대가이다.
이 사당은 조선 세종 때의 학자인 문간공(文康公)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숙종 병술년(1706)에 건립하였으며 사당·추원당(追遠堂)·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3량구조 맞배지붕이며, 추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설치하였으며 방 1칸, 대청 2칸, 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문인 명성문(明城門)은 정면 5칸의 솟을대문으로 가운데 1칸은 출입문으로 하고 양측 2칸은 방, 광등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매년 봄 가을에 제향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의 학자인 김숙자[1389~1456]를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706년에 건립하였다. 김숙자는 김종직의 아버지로 조선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1414년[태종1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고령현감, 성균관사예 등을 지냈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고향인 밀양으로 낙향하여 길재의 학통을 이어 정주학을 발전시키는 등 학문에 전념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자세와 함께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했고 길재의 학문을 아들에게 잇도록 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3량 구조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고 추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정면에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평면 구조는 방 1칸, 대청 2칸, 방 2칸으로 되어 있다. 정문인 명성문(明城門)은 정면 5칸 규모의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1칸은 출입문으로, 양쪽 2칸은 방과 광 등으로 사용한다.
거창 IC에서 농공단지를 지나 신원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남상면사무소로 가는 갈림길이 나옴. 갈림길에서 남상면사무소 쪽으로 우회전하여 20미터 지점 좌측편에 있는 대산마을 내에 위치. 거창읍에서 10분소요.
일원정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야은 길재(冶隱 吉再)·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점필재 김종직( 畢齋 金宗直)·한훤 김굉필(寒喧 金宏弼)·일두 정여창(一 鄭汝昌)·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등 성리학의 연원을 같이하는 7현을 모시고 제향하는 곳이다.
본 채인 일원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설치하였다. 객사인 부속건물은 정면 5칸의 목조와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쿨 앞 황강 언덕에는 김숙자 선생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선산김씨 김숙자의 후손들이 유림과 더불어 세웠다.
일원정은 1905년 선산(善山) 김씨 김숙자(金叔滋)의 후손들과 유림(儒林)들이 건립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 등 칠현(七賢)을 제향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서원 역할도 했다. 이들 일곱 분의 선현(先賢)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정통적인 계승자로 받들어지던 인물들이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설치했다.
부속건물인 객사(客舍)는 정면 5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며, 건물 앞 황강 언덕에는 김숙자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